의해 죽은 사람은 3,200만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중국인이 일본고위층을 암살한 경우는 거의 전무했다. 그에 비해 한국은 만 35년동안 3만2천명으로 중국 피학살자의 천분의 1에 불과했지만 일본 고위층 암살 시도와 성공 횟수는 세계가 감탄할 정도였다. 1909년 안중근 의사는하얼빈역에서 전 일본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했고,1932년 이봉창의사는 도쿄에서 일왕(日王)에게 폭탄을 던졌으며, 같은
대기근때마다 이상 저온현상으로 인한 냉해를 가장 많이 입은 곳이 바로 동북지방이었기 때문이다. (0) 아이 살해는 주로 어머니들이 맡았다. (1) 농민 봉기 (2) 에도시대 중기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농정학자. 저서로는 종수원법(種樹園法), 경제요록(経済要録), 경제제요(経済提要), 농정본론(農政本論)등이 있다. (3) 지금의 야마가타현(山形県)과 아키타현(秋田県) 일대 (4) 지금의 후쿠시마현(福島県),
180년 주기로 한국의 기운은 상승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다. 어느 정도의 난관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이를 극복하고 도약하리라 믿는다. 한국의 객관적 지표들이 현저히 나빠지고 있다. 보다 큰 불행의 전주곡들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듯 하다. 하지만, "궁즉통 극즉반(窮則通 極則反):궁하면 통하고 극에 달하면 반전하게 된다"이라 하였으니 머지않아 반전의 기회가 오리라 믿는다. 한국인은 필리핀이나 아르헨티나, 그리스처럼 추락할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신사 앞에서 항의활동을 벌였다가 체포된 중국인 2명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도쿄 지재는 이날 중국인 남성 A씨(55)와 여성 B씨(27)에 대해 각각 징역 8월에 집행유예 3년,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재판장은 판결 이유에 대해 "항의활동은 종교시설의 평온한 환경을 해친다"라고 지적했다. 변호인 측은
유통 시장을 장악하고 부동산등 어마어마한 대기업이 되었는지 궁금해서 자료들을 찾아보던중 찾아낸 자료입니다 아베 가문 오시마 요시마사 : 조선에 동학농민운동 발생하여 민씨 일가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파병을 요청하자 청-일간 텐진 조약에 의거하여 일본군도 제물포에 8000여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상륙한 사람 . 저 작자가 상륙하자마자 한일은 경복궁으로 달려가 유린한 인물이고 후에 명성황후응 강간하고 죽이는데 큰 역활을 한 인물 A급 전범
사용하게 강요받고, 각 고유 언어를 쓰는 원주민들에게 보통화인 만다린어를 강제사용하게 하는 등 중국의 통제만 적용하고, 시설이나 문명도입에는 전혀 힘을 쓰지 않았다고합니다. 방치한거죠. 또 탄압이나 억압이 무척 심했고 장제스가 민주화에 힘쓴다며 대만인들에게 온갖 강제노역을 시키거나 핍박도 했고요. 그래서 대만인들은 내가 중국이 싫어 대만섬에 와 사는데 또 중국인이 되었다며 싫어했었답니다. (그리고 여기서 방치에 가까운 대만섬 통치를
싶어했던 악습인 마비키를 우리 민족에게 덧씌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치유신을 기점으로 인구증가를 위시한 국가 경제발전을 위해 이러한 잔인한 풍습은 살인죄로 간주되어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마비키는 율령으로도 결코 막을 수 없었다.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마비키가 살인죄로 규정되면서 영아살해 풍습이 일본사회에서 공식적으로는 자취를 감춘 것 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 이후에도 지방 곳곳에서 몰래몰래 어린아이를 죽이는 풍습이 자행되었다. 명치유신 이후까지도 몇몇 지방에서는 남 몰래 마비키가 이뤄졌다고
일제 강점기 바로 이전에 조선을 침탈하는데 큰 역활을 한 인물 기시 노부스케 : 일제 강점기때 가장 악질적인 최상위층 A급전범 한반도에서도 악질적인 인물이지만 실제 만주국을 세운 장본인이고 만주국 실제 총책임자 대표적으로 난징대학살을 주도한 인물
구하던 라베는 이 학살극을 근본적으로 멈추기 위해서는 독일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는 존경하는 총통에게 관련한 편지를 썼지만, 이 편지는 히틀러에게 전달되지도 못했고 (전달되었다고 뭐가 달라졌겠냐만은...) 라베는 오히려 나치당으로부터 독일과 일본의 우호관계에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경고만을 받았어. 그러나 라베는 굴하지 않았고 결국 직접 독일로 가는 것을 택했어. 그리고 그는 베를린에서 난징학살의 처참한 광경을 담은 필름과
피임수단이 없었던 당시 시대상 어쩔 수 없었던 필요악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기근에 의한 생활고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키울 수 없는 어린 자녀를 부모 손으로 거두던 현상은 사실 일본 말고도 우리나라와 세계 곳곳에서도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일본의 마비키 풍습은 사회적으로 대기근이나 전쟁이 없었을 때에도 일종의 낙태의 한 방법으로서 상당기간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도 다른 현상이다. 두번째 사진을 보면 아이의 목을